언어 사랑 11

한자를 모르면 안 되는가?

오랜 세월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아온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한자로부터 자유로운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우리는 평소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 일본은 한자(칸지)를 병기해 온 오랜 관습 때문에 문자를 디지털화 하는 데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힘든 언어생활을 하고 있다.  한자가 유일한 문자언어인 중국과 대만, 홍콩 역시 디지털 시대에 한자라는 복잡한 표의문자 언어 시스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고, 영어나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의 편이성을 내심 엄청 부러워한다.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어렵게 배운 '이기다'라는 단어가 있다. 赢자다. 赢了 赢了!  "이겼어! 이겼어!" 할 때 쓰는 단어다. 컴퓨터 화면에서 이 글자를 치고 싶으면 우선 알파벳으로 ying..

언어 사랑 2024.07.15

ChatGPT를 통한 우리말 '새띈' 공부

ChatGPT, 대체 넌 누구냐? 시를 읽다가 '새띈'이란 형용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야 새띈 매화장(梅花粧)인가' 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매화장은 매화잠처럼 옛 시절 여인들이 경사스러운 날에 머리에 매화를 꽂아 치장하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짜 매화를 꽂을 수도 있고.... 인공 장식을 꽂을 수도 있다. "새띈 매화장'....! 그렇지 않아도 난해한 시인데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새띈 매화장'이란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니 '새띄다'라는 우리말 형용사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었다. 구글을 검색해 보니 심훈(1901-1936)의 '영원의 미소'라는 소설에 여자의 목소리를 묘사하는 형용사로 쓰인 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새띈 여자의 목소리는 층층대로 따..

언어 사랑 2024.04.18

김지하 시인의 시 '유목과 은둔'을 읽고

적적하던 차에 책꽂이에 꽃힌 시집을 꺼내어 김지하 시인의 시를 한 편씩 읽어나갔다. 그 중에 '유목과 은둔'이라는 표제시가 눈에 들어왔다. 유목과 은둔 의리(義理)가 낮은 샘가에 피묻은 채 머물고 온 허공에 수만 가지 꽃, 꽃들이 어지러이 피어 어찌 나갈까 저 먼 쓸쓸한 바다까지 가 마침내 내 두 아이를 만나 기어이 데리고 돌아올까 유목과 은둔의 집이여 오랜 내 새 집에. 사유와 리듬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잘 썼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너무 어려웠다. 의리(義理)가 왜 나왔지? 꽃들이 왜 나왔지? '저 먼 쓸쓸한 바다'는 도대체 어디지? 데리고 돌아올 '두 아이'는 누구지? '유목과 은둔의 집'은 도대체 어떤 의미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시의 여백에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 낙서를 해나갔다. 우리..

언어 사랑 2024.03.22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 한글 창제

1443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바로 그 무렵 중국 명(明)의 황실에선 8살에 황위에 올라 환관 왕진(王振)의 조종을 받고 있던 스물 다섯 살의 영종(英宗)이 수비대장과 목검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영종이 사정 봐주지 말고 공격하라는 말에 날카로운 공격을 하다가 수비대장의 목검이 영종의 몸을 스치며 겉옷을 갈라지게 했다. 영종은 잘 했다고 칭찬하며 '너를 용서한다'는 말을 들려주며 그를 내보냈다. 하지만 왕진은 그를 다시 불러 '황제는 용서했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지 못 한다. 이 놈에게 곤장 70대를 가하라!' 그는 곤장 70대를 찰지게 맞고 평생 걸을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황제의 권위가 곧 그의 부귀영달의 근원이었다. 그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오버에 오버를 거듭했..

언어 사랑 2023.01.30

중국어 동화로 빠지는 童心의 世界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되었다. 강호에 수많은 고수들이 두루 활동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달인이 되겠다고 다짐했지만 달인의 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독학으로만 공부한 탓에 특히 발음이 안 좋아 회화는 젬병이 된 게 아닌가 싶어 이제 드디어 학원에 등록하여 다니고 있다. 원어민 선생님으로부터 실생활에 쓰이는 표현을 하나 하나 배우다 보니 회화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다. 중국 드라마 麻辣芳邻을 다운로드 받아 열심히 보며 공부하고 있고, 요 며칠 동안은 중국어 동화에 푹 빠졌다. 중국어 동화 읽기로 동심의 세계에 빠져든다. 너무 행복하다. 백설공주나 은도끼 금도끼도 좋고, 안델센의 성냥팔이 소녀 중국판 동화도 너무 좋았지만 오늘날 찐 중국 교육문화가 들어있는 진짜 동화로 치고 들어가고 싶어..

언어 사랑 2022.12.21

신박한 우리말 신조어 '썸 타다'

신비한 우리말에 '봄 타다' '가을을 타다'라는 동사가 있다. 이걸 영어로 번역하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타다'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무려 뜻이 아홉 가지나 되는 다의어(polysemous word)다. 대표적인 의미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불에 타다. 2. 햇볕에 타다. 3. 말을 타다. 4. 산을 타다. 5. 설탕을 타다. 6. 곗돈을 타다. 7. 복을 타고 나다. '봄 타다'라는 말의 뜻은 봄철에 입맛이 없어지거나 봄기운 때문에 마음이 들뜨는 것을 의미한다. '타다'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어떤 조건이나 시간, 기회 등을 이용하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봄이나 가을을 타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의미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신조어 '썸 타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무슨 말..

언어 사랑 2022.11.24

순우리말 '수나롭다'와 '사랑옵다'

알면 알수록 아름다운 순우리말! 그 우리말이 잊혀져 갈까봐 오늘도 낱말 두 개를 뽑아 소개해 보려 한다.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서 기회가 되는 대로 자주 사용했으면 해서다. 첫번째 낱말은 '수나롭다'인데 ‘어떤 행위나 상태가 어려움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품사는 형용사이고 '수나롭게'라는 부사형으로 많이 쓰인다. 다른 예문을 보자. 1. 걱정 마시오. 혼담이 수나롭게 진행되고 있소. 2. 공부를 좀 했더니 그의 시를 읽기가 훨씬 더 수나롭네. 3. 머리를 쓰면 쓸수록 수나롭게 돌아간다고! 4. 일이 수나로와져 가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시게. 다음으로는 '사랑스럽다'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 '사랑옵다'를 뽑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의 동의어이자 형용사로 ‘생김새나 하는 짓이 사랑을 느낄 정도..

언어 사랑 2022.10.24

조금은 어렵고 복잡한 언어 이야기

언어란 무엇일까? 말 안 해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쉬운 질문이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답하기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딱부러지게 이거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좀 어렵지만 평생 공부해 온 것이기에 그래도 최대한 쉽게 언어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확고한 생태적 지위를 확보하고 다른 동물 종들과 대비하여 월등하게 생존력을 높일 수 있었던 언어의 사용은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와 더불어 꾸준히 발전해 왔다. 처음에는 동물의 의사소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도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언어는 복잡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가장 배우기 쉽고 가장 효율적으로 정보처리를 할 수 있는 도구로 진화해 왔다. 인류는 이 언어라는 마법적인 도구를 통해 서로 공감하고, 정보를 나누면서 침팬지의 20명 남짓한 집단을 뛰..

언어 사랑 2022.10.13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말에 '홀딱' 또는 '홀라당'이란 말이 있는데 몽골어로 '빨리'라는 말을 'хурдан'(홀당)이라고 한다. 웬지 우리말 같은 느낌이다. 그외에도 뭔가 뿌리가 같았을 법한 느낌의 단어들이 많다. 우리말 '할매' '할배'를 몽골어로는 '에메' '어부어'라고 한다. 우리말 '애미' '애비'와 발음이 비슷하다. '어제'와 '오늘'은 '어칙들' '어너들'이라고 하고 '조금(a little)'은 '젘홍'이라고 한다. 타고 가는 '말'을 '몰'이라 하고, '해(sun)'는 '날'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한자 日을 읽을 때 '날 일'이라고 읽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꽃'은 '치칙'이라고 하고, '돌(stone)'은 '촐로'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느낌이 너무 비슷하다. 고대 우리말 '늑떼'의 '늑'은 어..

언어 사랑 2022.10.10

아름다운 우리말 함초롬히와 시나브로

꽃이 핀 길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종종 이슬에 젖어 함초롬히 핀 꽃들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한다. 어느 여름날 함초롬히 젖은 분홍낮달맞이꽃을 보았다. 연잎들이 이슬에 젖어 함초롬히 빛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함초롬히는 무슨 뜻일까? '함초롬하다'는 동사도 있다. 1)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함초롬하다. 2) 눈물 머금은 아이의 눈이 함초롬했다. '젖거나 서려 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하다'는 뜻이다. 어느 초등학생이 시를 썼다. 그런데 제목이 '시나브로'고 시 한가운데 '시나브로'가 들어가 있다. '시나브로' -- 이제는 잊혀져 가는 우리말 8종 중 하나다. 어린 시절 할머니나 어머니가 해주시던 말씀 중에 이 단어가 들어있었다. "진득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시나브로 좋아진단다...." 시나브로..

언어 사랑 2022.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