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묵상 11

노예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값에 나온 여인

침략으로 제국을 건설한 로마나 그리스 문명과 마찬가지로 중동 문명권도 오랜 기간 동안 피지배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라고 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오토만 제국의 제2대 왕 오르한 가지는 3명의 그리스 출신 첩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하다. 피정복지에서 데려온 처자들이다.  아랍 세계를 정복하고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오토만 제국에는 각국 노예들이 넘쳐났고 노예들 가운데는 여자 노예들도 많았다. 노예는 하나의 상품이었고, 마치 물건처럼 각자의 쓸모에 따라 값이 정해졌다.  이런 시대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온 우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아랍의 어느 술탄이 노예시장의 한 여자 노예가 다른 노예의 백배 값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도대체 왜 그런 값을 매겼는지 궁금해진 술탄은 사..

동양고전 맹자와 주역을 읽고

언제부터인가 다석 류영모 선생님을 존경해 왔다. 최근 다석의 육성 강의 녹음을 정리하여 해설을 붙인 《다석 마지막 강의》란 책을 읽게 되었다. 선생님의 깊은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의 타고난 천성의 바탈, 마음, 우리의 속알을 길러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온 인간은 모두가 다 '아들'이다. 우리 모두가 예수 같은 '아들'이 될 수 있다. 예수는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들 노릇 잘 해라!'라고 부르짖었을 뿐이다. '아들'은 참나이고 '얼로 솟은 나'이다." 선생님은 강연에서 맹자를 강추하셨다. 맹자는 깊고 깊다고. 얼을 통해 사물을 궤뚫어 보는 형형한 눈이 있다고. 그래서 《맹자》를 읽었다. 읽는 동안 맹자의 거침 없는 행보와 유연한 사유, 그가 꿈..

도마복음서를 읽고

2차대전이 끝나던 1945년 12월 이집트 마그 함마디에서 항아리에 밀봉되어 묻힌 지 약 1600년만에 콥트어로 기록된 도마복음서가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밀봉되었다는 것은 이 문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이단으로 몰리고 사형으로 이어지는 종교재판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문서의 가치를 생각할 때 소지는 해야겠고 또 후대에 남기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인적이 드문 깊은 동굴 속에 고이 고이 봉해 두었던 것 같다.  도마복음서는 그렇게 1600여년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한 손길이 닿아 기적처럼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이보다 반세기 전인 1897년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도 다양한 초기 기독교 파피루스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1번과 654번, 655번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가 나그..

산상수훈의 교훈: 虚心과 清心을 가진 자들과 天国

우리 집은 원래 유교 집안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한 달에 한번꼴로 찾아오는 조상님들의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힘겨운 시골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달에 한번꼴로 떡도 먹고 과일도 맛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비난수를 잘 하셨다. 정월 초하루 떡시루를 안방 웃목에 모셔놓고 삼신 할미께 공손히 양손을 비비며 비난수를 하셨다. 자식들 잘 되라고.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을에 교회가 있었다. 육이오 사변 직후 양철 콘센트 막사로 지어진 둥그런 교회였고 잘 가꿔진 일본식 화단과 허물어져 가는 종탑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교회 주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자주는 아니고 몇 달에 한두번쯤 뜸뜸히 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교회 학생회의 임원이 되었다. 세례도 받고 기독교 신앙에 ..

김지하 시인의 시 '花開'를 읽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꽃을 좋아한다. 바야흐로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오고 있다. 마음이 착잡하여 시 한 편을 읽었다. 김지하 시인의 ‘화개’다. 화개(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 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시를 한 두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서 가볍게 분석을 해보았다. ◆ 성격 : 철학적, 서정적, 지식발견적(heuristic), 영탄적. ◆ 표현과 구성 : 권위를 암시하는 청유법 대화로 시작. 1연과 2연의 상호대응 및 상호보완식 구성이며 전체와 부분이 유비적으로 연결되는 제유적, 점층적 의미확대식 구성. 마지막 문장, 즉 2연은 ‘화개’는 '허공에 별 뜨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윌리엄 어빈(William Irvine) 교수가 쓴 '훌륭한 삶에 대한 안내'(A Guide to the Good Life)라는 스토아철학(Stoicism) 입문서를 우연한 기회에 구입하여 읽으면서 고대 로마인들의 철학과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놓은 거대한 수로 건축물이었다. 수백리가 떨어진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다 식수로도 쓰고 목욕물로도 쓰기 위해 수로를 건설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로마에서 500km 떨어진 지방도시를 마차가 달릴 수 있게 직선도로를 놓기도 했다. 2,000년전은 그만두고 100년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직선도로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길은 자연의 윤곽을 따라 나 있는 곡선도로였다. ..

책 속에 길이 있었네

어린 시절 이상하게도 나는 책이 그렇게 좋았다. 책이 귀하던 시절 우리 집엔 책이 거의 없었고, 가끔씩 책 한 두권이 동네를 떠돌아다녔다. 의적 일지매, 어사 박문수, 로빈슨 표류기, 햄릿, 이솝 우화집, 예수님과 양 그림이 표지에 나와 있는 요한복음 쪽복음 책, 찢어진 만화책 등등. 닥치는 대로 책이란 책은 사그리 빌려와 읽어치우곤 했다. 재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잘 사는 집 아이들 집에 갖춰 놓은 위인전집이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 배 타고 떠나는 콜럼버스, 다재다능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등등. 우리 집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문학전집 같은 건 언감생심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찌어찌 해서 우리 집에 굴러들어온 한국문학전집 몇 권에 대한 추억이다. 거기엔 김..

감동을 주는 역사 속의 세 인물

우연한 기회로 역사 속의 세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우연한 기회는 내게 큰 행운이었다. 1800년대 중엽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 이 땅에서 토종 개벽(開闢)사상을 이끌어냈던 최제우 선생과 갖은 어려움 속에서 경전을 간행하며 동학을 정립시키고 포덕(布德)하는 일에 헌신했던 제자 최시형.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 가슴에 품은 혁명(革命)의 결기를 실천으로 옮기며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관아에 잡혀 들어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의로운 사람을 끝까지 쫓아 잡아다 죽이는 정부. 그 불의한 정부가 바로 조선이었다. 이 민족의 예수와 같고 바울과 같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죽여야 했을까? 이해할 수 없고 한없이 부끄럽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

루쏘의 교육소설 <에밀>을 읽고 나서

사람은 제각기 순례의 길을 간다. 나에게는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순례의 길이다. 최근 장자끄 루쏘(Jean-Jacques Rousseau)의 교육소설 에 꽂혔다. 루쏘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20년을 묵상하고 준비해 오다가 3년의 집필과정을 거쳐 1762년 드디어 이 책을 출판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민 교육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책 같다. 불어 원본은 아니고 영역본으로 읽었다. 18세기 중엽 지금으로부터 260여년 전,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영조 때이지만, 유럽은 이때 이미 정기적으로 일간신문이 발간되어 영국 신문을 읽고 프랑스나 스위스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던 시대였다.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던 계명한 세상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김지하 시집 <흰 그늘>에 나오는 시 '나'

책방에서 사 온 김지하 시인의 시집 을 읽고 있다. 첫 시로 등장한 게 '나'인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너무 좋은 시였다. 그냥 읽으면 이해가 안 되는 시인 듯하여 공부를 하며 읽었다. 이 詩는 한 마디로 우주를 향해 마음을 여는 시이다. '나'는 우주를 향해 마음을 닫지 않고 열어 놓고 있고, 또 그리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를 천명하는 시이다. 지기(至氣)로 시작해서 골덕내로 끝난다. 至氣는 천도교에서 '우주 본체의 본질을 理的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기금지 원위대강'은 '지기가 지금 나에게 크게 내려오기를 소원하나이다'라는 기도문이다. 바로 뒤에 오는 '모심'이라는 말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의 기운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시고 받들겠다는 다짐이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말은 큰 우주를 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