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묵상

루쏘의 교육소설 <에밀>을 읽고 나서

제이콥KS박 2022. 10. 12. 09:33

사람은 제각기 순례의 길을 간다. 나에게는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순례의 길이다.

 

최근 장자끄 루쏘(Jean-Jacques Rousseau)의 교육소설 <에밀>에 꽂혔다.

 

스위스 태생 프랑스 철학자 장자끄 루쏘의 초상

루쏘는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20년을 묵상하고 준비해 오다가 3년의 집필과정을 거쳐 1762년 드디어 이 책을 출판한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시민 교육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책 같다.

 

에밀의 프랑스어 초판 표지

불어 원본은 아니고 영역본으로 읽었다.

 

18세기 중엽 지금으로부터 260여년 전,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영조 때이지만, 유럽은 이때 이미 정기적으로 일간신문이 발간되어 영국 신문을 읽고 프랑스나 스위스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던 시대였다. 오늘날과 크게 다를 바 없던 계명한 세상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루쏘의 생각은 아주 현대적이고, 과학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교육과 행복에 대한 루쏘의 가르침을 차포 떼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아이는 길들이지 말고 자연 속에서 뛰놀며 거칠게 자라게 하라.

둘째, 선악을 가르치려 들지 말고 아이 스스로 사물을 접하며 알아 가게 하라.

셋째, 가르치는 자는 말을 적게 하고 행동으로 보여줘라.

넷째, 지식은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알게 하라.

다섯째, 아이가 시민으로서의 상식’을 갖추고 좋은 취향’(good taste)을 계발하도록 도와줘라.

 

이렇게 교육 받은 에밀같은 아이는 장차 어떤 인물이 될까?

 

지적이고, 개방적이고,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루쏘는 주장한다. 새 시대의 새 어린이, 새 인간, 모든 사회적 구속과 억압을 던져버린, 자신과 같은 자유주의자’로 자랄 것이라고 루쏘는 확신한 듯하다.

 

그런데, 중요한 게 하나 빠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지 않는가? 아이가 자연 속에서만 뛰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능력은 어디서 기를 것인가?

 

이런 얘기들도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부(riches)가 필요 없다. 스스로의 의지를 제어할 수 있는 자제력만 있으면 된다.

 

프랑스 어느 농부 가족의 단란한 모습

"'건강과 매일 먹을 빵'(health and daily bread), 이 두 가지 정도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의 행복에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본성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면 '욕망(desire)'과 '권능(power)' 사이에 균형이 찾아온다. 여기에 행복의 뿌리가 있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루쏘 자신은 끊임없이 상류사회와 교류하며, 자유분방하고 감정에 충실한 삶을 추구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 약간은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대에 뒤진 생각들도 없지 않았다.

 

"철이 바뀐다고 그때마다 아이 옷을 갈아 입히지 마라. 여름옷을 겨울에도 입고 추위를 견디는 것이 건강에 좋다. 아이작 뉴턴도 마치 노동자들처럼 겨울에 늘 여름옷을 입었다. 그러고도 그는 80세까지 장수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소비가 미덕인 오늘날 우리에겐 맞지 않는 조언이다. 하지만 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행복은 호화로움이 보장해 주지 않는다…. 행복은 사회적 편견에 의해 굴절되기 쉽다…. 행복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아무 것도 거칠 것 없는 자유와 때묻지 않은 본성을 존중하자."

 

이것이 루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행복한 삶의 골격이다. 이런 말도 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사랑과 행복과 마음의 안정을 추구한다. 파리에서 멀리 떠나가면 떠나갈수록 더 좋다.'

 

파리(Paris)는 지금도 그때도 화려함의 대명사였다. 

 

파리 상젤리제가의 패션 상가 쇼윈도우
언젠가 찾아갔던 파리는 정말 화려하고 멋스런 도시였다

사랑과 행복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그러나 파리를 떠나라고 루쏘는 충고한다. 하지만 그는 1778년 파리 근교에서 산책을 하다가 쓰러져 저세상으로 떠났다. 죽기 전 그는 온갖 명예를 얻은 상류사회 셀럽이었다.

 

루쏘, 에밀, 본성, 자연으로 돌아가라, 파리의 화려한 물질문명과 계몽주의…. 이미 풍요로울 만큼 풍요로웠던 시대를 산 그이기에 언어의 행간에 여유가 느껴지고 사유에 기름(?)이 껴서 조금은 상식에 준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든다.

 

루쏘의 에밀을 읽고, 비슷한 계몽의 시기, 마치 '한국의 소크라테스'처럼 치열하게 지행합일의 길을 걸었던 조선 말기 개벽사상가이자 순교자 최제우(崔濟愚) 선생의 사상과 삶이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으로 이어지는 조선 말기의 격동기, 루쏘와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가난에 찌든 조선 선비의 삶을 의연하게 살다간 수운(水雲) 선생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이나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보이는 것과 같은 카오스모스적인 세계 인식이나 인간본성 사유의 심오함, 시대를 뛰어넘는 발상의 천재성, 폭넓은 소통의 다가감이 루쏘의 에밀에서는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역사가 펼쳐질수록 서양이 동양을 못 따라올 것 같다는 확신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