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로 역사 속의 세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우연한 기회는 내게 큰 행운이었다.
1800년대 중엽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 이 땅에서 토종 개벽(開闢)사상을 이끌어냈던 최제우 선생과 갖은 어려움 속에서 경전을 간행하며 동학을 정립시키고 포덕(布德)하는 일에 헌신했던 제자 최시형.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 가슴에 품은 혁명(革命)의 결기를 실천으로 옮기며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관아에 잡혀 들어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의로운 사람을 끝까지 쫓아 잡아다 죽이는 정부. 그 불의한 정부가 바로 조선이었다. 이 민족의 예수와 같고 바울과 같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죽여야 했을까? 이해할 수 없고 한없이 부끄럽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모습, 참혹한 처형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지만 여기 올리고 싶지 않다.
의로운 죽음, 거룩한 죽음, 그 죽음은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냥 내 가슴 속 진한 울분으로 간직해 두고 싶다.
세 분은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거룩한 순교자들이었다. 당시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우두머리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치욕적인 죽음이었지만 세월은 흘러 어느 덧 21세기, 지금의 우리들은 이 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예를 갖춰 기리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으로 복권을 해드린다.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영웅이자 시대의 고뇌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사나이, 전라도 고부군의 동학 접주 녹두장군 전봉준.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 읍내에 약방을 내어 호구지책으로 살고 있다가 탐관오리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보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갑오년 정월 마침내 봉기의 기치를 올린다.
그에게 동학이라는 개벽사상을 심어준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수운과 해월이었다.
수운은 말한다. "우리가 곧 한울님이다. 한울님은 미완의 ‘어리숙한’ 존재다. 그를 믿고 받아들여 완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오롯이 우리들의 몫이다."
참형으로 졸지에 스승을 잃고, 평생을 수배령이 내려 쫓겨다니며 태백산 소백산 백두대간 줄기의 산간 오지마을 50여곳을 전전하면서 굶기를 밥먹듯이 하고 헐벗은 채 풍찬노숙(風餐露宿) 해야 했던 해월!
그가 말한다. "밥 한 그릇 속에 한치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는 우주 대자연의 운행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물 곤충들의 협동, 그리고 숭고한 인간의 노동이 어우러지는, ‘우주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동학 동지의 집을 찾아가 며느리가 뒷방에서 베를 짜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누가 베를 짜는가?’ ‘제 며느리올시다.’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짜고 있다.’
또 한번은 이렇게 가르쳤다. ‘아이를 때리지 마라.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 한울님은 매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150 여년 전 강상(綱常)의 법도가 엄존하던 봉건사회에서 아, 이런 놀라운 발상과 깨달음에 실천이라니!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시천주(侍天主)의 사상! 하찮은 너와 내가 한울님을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주체다. 수심정기(守心正氣)! 누구라도 갈고 닦으면 빈천한 우부(愚夫)의 삶이 아닌 거룩한 성현(聖賢)의 삶을 살 수 있다.
있는 자들이, 가진 자들이, 양반들이 목숨을 거둘 수도 있고 사고 팔수도 있었던 한낱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던 하찮은 인간들인데, 너와 나, 무릇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차이 없이 똑같은 평등한 존재라는 이 놀라운 사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수운과 해월, 녹두장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그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들이었을까?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이 사상에 근거하여 후천개벽의 평등세상이 온다고 주장하는 최제형과 최시형의 동학은 탐관오리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시대의 고뇌를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전봉준. 이들은 망해 가는 조선에 꺼지지 아니하는 불꽃 같은 희망을 심어 주었다.
이 희망으로 황해도의 동학 접주 김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15인의 동학 교도들이 33인의 대표가 되어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세계만방에 우리의 독립과 자존을 천명했다.
아, 캄캄한 어둠 속을 걷던 역사의 암흑기에 한 줄기 불빛이 되어 민족의 길을 인도했던 선구자이자 각자(覺者)이고 목숨까지도 바치며 신념을 지켰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참 지도자들! 수운, 해월, 그리고 녹두장군....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히 빛나는 위대한 인물들이다.
이 세 분의 의로운 생애에 삼가 겸허히 머리 숙이며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부족하지만 나도 그 길을 따라가겠노라는 다짐과 더불어.
더 이상 학정을 참지 못 하고 분연히 일어나 불의에 맞서 싸운 동학 농민군! 그들 중 한 명이 나중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주리를 틀리며 고초를 당하신 병(炳)자와 홍(洪)자를 쓰시는 나의 증조부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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