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너무도 쉬운 질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 해보면 한없이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나이는 꽤 들었고, 은퇴 후 하루 하루 책을 읽고 묵상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평생 언어(言語)에 관심이 많아 문학과 언어학을 공부했고, 영어를 통달했다. 시간이 많은 요즈음엔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특히 중국어의 매력에 꽂혀 밤낮으로 중국어 공부에 매달린다. 우리말과는 조금 다른, 그러면서도 웬지 비슷한 중국어가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다.
공부한 언어는 열개쯤 된다. 그 중 좀 나은 언어는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불어, 몽골어, 일본어, 중국어 정도다.
인간은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이 뇌에 씌어 있어 이 일을 하지 않고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는다.
매일 매일 언어를 대상으로 지식과 기술을 익히며 세월을 낚고 있다. 매일 매일이 재미있고 신기하고 의미있고 보람차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를 좋아하는 자칭 로맨티스트이다.
이만하면 이제 이게 '나'일 것 같다.
헌데, 아니다.
당나라 말기 운문종의 종조인 운문(雲門)선사가 제자들에게 답했다.
"약과 병은 서로 응한다. 온 대지가 약이다. 이러하매 무엇이 '自己'이겠느냐?" (药病相治 尽大地是药 那个是自己?)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영어 책 "One Blade of Grass"(풀잎 한 날)에서는 이 공안(公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Medicine and disease correspond to each other. This whole great earth is medicine. Where is your true self?"
참선 수도자이자 책의 저자인 Henry Shukman은 '자신'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요 스토리요 꿈이라고 얘기한다.
소위 '견성(見性)체험'이라고 하는 깊은 깨달음의 경지를 여러 차례 겪고 보니 이제 막 그 '꿈'에서 깨어난 참 '자신'이 보인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블랙홀 같은 텅빈 무(無), '공무(空無)'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자연 가운데 가장 연약한 '풀잎 한 날'쯤으로 여긴다.
풀잎 한 날.
그 옛날 달마대사가 서쪽으로부터 와서 '풀잎 하나'를 타고 양쯔강을 건넜다는 그 '풀잎 한 날'이다.
슉크먼은 말한다.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구석들이 다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참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그리고 모든 업보들(karmic sins)로부터 놓임을 받았다고. 원죄로부터 비로소 씻음을 받은 새사람을 느꼈다고.
과거에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나쁘지 않았고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좋지도 않았다고.
그래서 세속적인 모든 명예와 체면과 속박과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고.
'성스러운 아이(a sacred infant)'처럼 온전히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그리고 텅 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연장인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그의 '자기' 인식이 부럽고 그의 심오한 깨달음이 부럽다.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Kudos to him....
'나'는 누구인가? 이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누구인가?
화두처럼 공안처럼 진득하게 붙잡고 한번 이 물음을 끈질기게 던져볼 생각이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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