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바로 그 무렵 중국 명(明)의 황실에선 8살에 황위에 올라 환관 왕진(王振)의 조종을 받고 있던 스물 다섯 살의 영종(英宗)이 수비대장과 목검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영종이 사정 봐주지 말고 공격하라는 말에 날카로운 공격을 하다가 수비대장의 목검이 영종의 몸을 스치며 겉옷을 갈라지게 했다. 영종은 잘 했다고 칭찬하며 '너를 용서한다'는 말을 들려주며 그를 내보냈다.
하지만 왕진은 그를 다시 불러 '황제는 용서했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지 못 한다. 이 놈에게 곤장 70대를 가하라!' 그는 곤장 70대를 찰지게 맞고 평생 걸을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황제의 권위가 곧 그의 부귀영달의 근원이었다. 그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는 오버에 오버를 거듭했고 온갖 나쁜 짓을 하다가 결국은 몽골과의 전투에서 황제가 포로로 잡혀간 날 만리장성 밑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그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준마 1만필을 공물로 요구했다. 지금도 말 1만 마리는 어마어마한 재산이다. 당시 조선의 GNP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요구였다. 밤낮으로 세종의 고민이 깊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세종이 명나라에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했으니 용인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젊은 황제는 칙서에 그까짓거 용인해 준다라고 쓰라고 했지만 왕진은 한 줄을 더 적었다. 용인해 주는 댓가로 몽골과의 전쟁에 조선 정예군 10만을 보내라. 물론 조선은 안 보내고 버텼다. 아니 못 보냈다. 보내는 순간 국고는 거덜나고 나라는 피폐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영종은 왕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원을 세워 호심탐탐 명을 노리는 몽골 오이라트족을 친정하고자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토목으로 북진한다. 하지만 날렵한 몽골 기마군에게 둘러싸여 포로가 되었고 그후 수습을 지시하던 왕진은 명의 장수에게 죽임을 당하고 명나라 황실은 몇 년동안 제앞가림하기도 어려운 지경에 놓인다. 덕분에 조선에 대한 요구는 까맣게 잊혀졌다.
한글은 천운을 타고난 발명품이었다.
세종 당시 주변 정세는 너무도 안 좋았다. 서몽골 오이라트족의 에센(也先) 다이시는 회교국가 무굴을 점령하여 그곳의 공주를 첩으로 삼고 동서 몽골을 규합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과시했다. 그는 다만 징기스칸의 직계가 아니었던 까닭에 늘 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열등감에 시달렸다.
잔인무도한 그는 사냥을 나가면 병사들을 들로 뛰게 한 다음 화살로 쏘아맞춰 죽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총애하는 후궁을 불러 춤을 추게 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어 맞혀버렸다. 숨이 끊어지지 않자 주위 호위병들에게 마무리를 지시했는데 그 중 한 명이 활시위를 잡은 채 주춤거리자 바로 칼을 빼어들어 그의 목을 쳐버렸다.
초토화 전략을 최우선시하는 몽골군의 잔인성은 세계 역사에서 그 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에센 다이시는 암살자를 조선으로 보내 세종을 시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파스파 문자와 파스파 문자의 원리가 들어있는 '몽골자운(蒙古字韻)'이라는 책을 얻고자 세종은 두 명의 역관을 머나먼 땅 만주와 몽골로 보내 이를 확보했다.
세종의 밀명을 받아 수 차례 중국과 몽골의 사지를 드나들던 두 명의 역관은 숱한 희귀본들을 세종에게 얻어다 준다. 그러다 종국엔 명의 왕진에게 잡혀 스파이 혐의로 참수된다.
세종 당시 주변의 정세는 엄중했다. 왜는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사신으로 보낸 신숙주를 체포하여 배 밑창에 구금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는 왜선에 타고 있던 어린 시종에게 한글을 가르쳐 언어의 이치를 깨치게 했고 이를 본 그 아비의 도움으로 목선을 얻어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한글을 창제한 후에 세종은 말했다. '이 바른 소리는 영리한 자는 반나절이면 깨칠 수 있고 미련한 자도 열흘이면 너끈히 배울 수 있다. 일단 배우고 나면 세상에 못 적을 소리가 없다. 바람 소리도, 멍멍 개가 짖는 소리도, 수탉의 울음소리도 모두 적을 수 있다!'
한글 창제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며 세종을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최만리도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 있음을 몰랐다.
만일 알았더라면 그는 목숨을 걸고 반대운동을 펼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을 따르고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지속적으로 도입하여 활용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그는 확신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글 같은 오랑캐 문자를 만드는 대신에 과거 조상들이 해왔던 이두(吏讀)를 발전시켜 한자로 우리말을 적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거대 한자 문명권에 안전하게 들어가고 머물러 있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글이 반포된 후 그는 반대 상소문을 거듭 올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궁녀들과 내관들을 핍박하다가 의금부에 갇히게 되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는 모범적인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한글의 가능성을 살펴 보았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만리동은 대표적 청백리였던 그의 이름을 딴 동명이다.
최만리 외에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너무 쉬운 문자체계인 한글을 멸시하고 배우기 어려운 한문을 숭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영어권 국가들의 위세에 눌려 영어라는 언어의 위세에 꼼짝 못 하는 거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글은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 적극적으로 활용을 장려하던 세종대왕이 돌아가신 후에는 한낱 마이너 언어로 전락하여 아녀자들이나 상것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퇴보해버렸다.
한글이 반포된 후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 양반 가문의 여자들은 이렇게 한글로 자신의 생각들을 적고 있었다. 만약 한글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들이 이렇게 절절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있었을까?
한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표적 신제품이고 신상이고 조선이라는 사회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바꾼 역대급 보물이다.
무수한 핍박 가운데서도 그 쓰임을 통해 한글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어엿한 국가의 문자로, 모두가 공인하고, 모두가 사용하는 메이저 언어 문자로, 세계의 석학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우수한 과학적 문자로 오롯이 전해졌다.
한글의 위대성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모음의 창제가 압권이라고 본다. 지구상에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 가지고 표기하는 문자도 많다. 한글 모음에는 천지인의 철학과 음양오행론의 철학이 들어가 있다.
한글은 당시 가능한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식과 모든 철학을 동원한 압도적인 발명품이며 수년간에 걸쳐 왕자들과 왕비와 빈들과 더불어 내궁에서 비밀리에 실험하고 토론하고 연구한 결과물이고 세종대왕 머릿속에서 태어난 산물(brainchild)이다.
세종은 당시 조선이 확보할 수 있었던 모든 문헌과 자료를 참고했다. 한양 외곽에 들어와 있던 아시리아 동방교회 네스토리안 신부에게서 서구와 아라비아 문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문자 체계도 참고했다.
세종의 지식의 지평에는 한계가 없었다. 한글은 현존하는 지구상의 메이저 문자들을 두루 참고하여 가장 심플하게 가장 자연의 섭리에 어울리게 만든 획기적 발명품이었고, 디지털 시대에 사는 오늘 우리는 그 혜택을 백배 천배로 누리며 살고 있다.
이 계명한 디지털 시대에, 한글 없이 한자로만 겨우 겨우 우리말을 적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세종대왕께서 붕어하실 때 환관 동우가 대궐 지붕에 올라가 대왕의 두루마기를 흔들며 한문 관용구를 사용하여 이렇게 외쳤다. '대왕이여 대왕이여 돌아오소서 돌아오소서!'
나도 간절히 외치고 싶다.
'대왕이여, 존경하는 나의 대왕이여, 돌아오소서!'
세종대왕님은 지금 이렇게 우리가 적는 한글을 통해 우리 곁에 돌아와 계신다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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