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꽃을 좋아한다. 바야흐로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오고 있다.
마음이 착잡하여 시 한 편을 읽었다. 김지하 시인의 ‘화개’다.
화개(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 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시를 한 두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서 가볍게 분석을 해보았다.
◆ 성격 : 철학적, 서정적, 지식발견적(heuristic), 영탄적.
◆ 표현과 구성 : 권위를 암시하는 청유법 대화로 시작. 1연과 2연의 상호대응 및 상호보완식 구성이며 전체와 부분이 유비적으로 연결되는 제유적, 점층적 의미확대식 구성. 마지막 문장, 즉 2연은 ‘화개’는 '허공에 별 뜨고 꽃 봉오리 열리는 것과 같은 우주적 생명 현상이다'라는 선언문의 형식.
◆ 주제 :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를 통한 주제 강조. 구체적으로 세 개 정도. ① 음양 조화 우주 속에서의 꽃핌 (경이와 미러클, 광대하게 벌어지는 우주생명 쇼의 축소판) ② 캄캄함과 빛남, 허공과 붉은 꽃 봉오리의 선명한 대비 (우주와 생명의 존재양상, 창조의 바탈로서의 무한공간 ‘허공’, 그 속에 존재하는 생명의 왜소함과 가련함. ③ 우리 인간은 모두 작은 꽃 봉오리이며 우리 인생은 거대한 우주 생명 쇼의 일환.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1. 부연: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로 처마 끝을 위로 들어올려 모양이 나게 한다. 남성 yang(阳) 이미지.
2. 알매: 기와를 일 때 산자 위에 이겨서 까는 흙. 여성 yin(阴) 이미지. 부연은 떠받들고 알매는 그 떠받듦을 받쳐준다. 모든 생명은 그러나 부연이 아니라 흙에서 태어남.
3. 어서 오십시오: 정중한 초청, 수용 요청, 초대
4. ~하거라, ~말아라: 당연한 일임을 명시하며 이것이 ‘하늘과 땅의 뜻’ ‘우주의 명령’이자 ‘우주의 숙명’임을 암시.
5.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우주의 조화와 협력에 대한 거부, 거절, 수용 불가 혹은 ‘따로 놀겠다’는 태도, 초대 거부. 천지는 yang 건곤은 yin으로서의 우주에 대한 음양 차원의 동어반복적 reference.
6.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초대를 수락하든 거절하든 우주는 끄떡없이 잘도 돌아간다. 계속해서 해는 yang(阳) 달은 yin(阴) 이미지. 음양의 조화, 한치의 오차 없이 질서 속에서 변화하는 우주. 그 속에 작은 한 부분을 구성하며 꽃핌이 존재하고 인간이 그 꽃핌을 지각한다. 아마도 ‘교육’ ‘학습’ 혹은 깨달음을 통해. ‘깨달음’은 넓은 의미에서 학습이나 교육의 결과.
7. 내 몸 안에: 우주가 내 몸과 관계하고, 내 몸에 똑 같은 우주의 섭리를 실현한다.
8. 캄캄한 허공: 별이 뜨는 바탕이며 꽃이 피는 바탕.
9. 새파란 별: 부인할 수 없는, 기적 같은, 하지만 너무도 명료한 우주의 나타남, 자기시현, 현묘한 생명현상.
10. 붉은 꽃 봉오리: 새파란 별과 똑 같은 생명의 자기계시, 우주의 나타남, 숭고하고도 처연한 생명현상.
11. 살풋 열리듯: 생명현상은 어마어마한 매크로 규모가 아니라 아주 작은 마이크로 사이즈로 온다. ‘열리듯’은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의 예일 수 있는 현상이기에 유비의 언어로서 ‘열리듯’이고 대주제 ‘화개’로 나아가는 디딤돌로서 ‘열리듯’이다. 너와 나는 다 이런 마이크로 생명현상에 의해 태어났다.
12. 아아 ‘화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존엄하고 숭엄하고 마법 같은 생명현상으로서의 ‘꽃핌’이기에 ‘아아’ 할 수밖에 없고 화개를 한자로 적은 건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벽암록(碧巖錄) 등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에 빚을 진 깨달음이라서 한자로 표기한 게 하닐까 한다. 그리고 한자는 상형문자로서 미술적 가치가 있는 상징물이다. '花開'에서 꽃은 꽃의 모양으로 씌어지고 ‘개’는 문이 열리는 모양으로 씌어진다. 한자는 언어이자 미술이다. 함부로 얕보아서는 안 된다.
이 시의 소재는 꽃이고 주제는 꽃핌이다. 그런데, 꽃이 피는 일에 서까래와 흙의 결합, 한옥 건축이 들어갔다. 꽃이 피는 일에 천지와 건곤이 들어갔고, 해가 돋고 달이 돋는 일이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한 송이의 꽃이 핀다는 것은 음양의 기운으로 돌아가는 우주 속에서 음양의 조화로 일어나는 우주적 생명현상의 일부요, 부분이 전체를 표상하는 제유적 상징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분을 보면 전체를 볼 수 있다. 시인은 그래서 꽃핌과 부연, 알매, 천지, 건곤과 해와 달, 허공에서 피어나는 새파란 별의 탄생을 연결시킨 것이다.
가냘프게 ‘살풋’ 열리는 꽃의 개화, ‘화개(花開)’!
그 ‘화개’는 부분이자 전체이며 꽃이자 우주 그 자체이다.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 나도 다름 아닌 그 일부일 뿐이며, 내 몸과 내 의식, 내 정신 속에서 수도 없이 꽃은 피고 별은 뜨고 진다.
꽃핌 속에서는 있음과 없음, 색(色)과 공(空)은 그리 큰 차이가 아니며 부연과 알매가, 천지와 건곤이, 해와 달이, 별과 나무가 굳이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서로 응하고 서로 통하고 서로 모시고 서로 받든다. 그래서 ‘어서 오십시오’ 하는 사이이고 ‘너는 가라’고 몰아내며 ‘따로’ 놀아서는 안 되는 사이인 것이다.
꽃으로 유비되는 우주 생명은 웅대하고 장엄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가냘프고 덧없는, 그래서 가련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시에서 애잔함과 비극성이 느껴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주와 그 속의 생명은 전체와 부분을 나눌 수 없고 주객을 나눌 수 없는 영원함이고 무궁이고 캄캄한 태초의 흑암이고 허공이다. 생명은 이 바탈 위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핌이다.
그래서 ‘아아, 화개!’밖에는 다른 외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우리에게 전해준 시인의 심오한 인문학적 깨달음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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