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을 잘 몰랐던 때가 있었다. 서양음악이 감미로와서 그 음악만 줄창 들었다.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들었고,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고, 베르디의 가극 나부코에 나오는 이탈리아인의 국민가곡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매료되어 들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4악장을 듣고 그 천재적인 표현력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기도 했다. 멘델스존의 '봄의 노래',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엘가의 '사랑의 인사', 모짜르트의 교향곡 40번 사단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모두들 아름답고 귀가 호강하는 듯한 음악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국악에 빠지다 보니 서양음악은 뒷전이 되었다.
판소리가 좋아졌고 이날치 밴드와 악단광칠, 이자람씨의 소리가 듣기 좋아졌다. 국악계 명창들의 천구성과 수리성, 시김새가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서양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발적인 깊은 공감이 걷잡을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이 되어 소리를 타고 들어왔다.
그러다 '정선아리랑'을 알게 되었다. '그늘'이 있는 노래.... 어딘지 모르게 '한'이 맺힌 노래....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였다.
정선아리랑 혹은 정선아라리는 느린 강원도 아리랑을 먼저 부르고 난 후 긴 사설을 빠른가락으로 촘촘히 엮어나가는 노래이고, 진도아리랑이나 밀양아리랑 같은 다른 민요들에 비해 노랫가락이 비교적 단순하며, 4음보의 운율이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려말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수백수가 전해져 오는 대하드라마 같은 민요 장르이며 2,000수까지 채집을 했다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버전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강원도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뒤에
칠성단 도두모고 팔자에없는 아들딸 나달라고 석달열흘
노구뫼에 정성을 말고 타관객리 외로이 난사람 괄세를 마라~~.
가사 중 '팔만구암자'는 80,009개의 암자라는 뜻일 수도 있겠으나 '팔람구암자' 또는 '팔방구암자'가 와전된 가사로도 본다. '팔람구암자'는 여덟개의 사찰과 아홉개의 암자라는 의미이며 '팔방구암자'는 여덟개의 방과 아홉개의 암자로 이루어진 금강산 4대 사찰의 가람 배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칠성단 '도두모고'는 '모셔놓고' 정도의 의미로 보면 좋고, '노구뫼에'라는 말은 노구솥(놋쇠솥)에 지은 '메' 즉 '밥'이란 뜻으로 치성을 들일 때 올리는 밥 한 그릇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수많은 명창들과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신세대 국악인 송소희양의 성음과 표현으로 이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
유튜브에도 추천할 만한 연주들이 많다. 그 중 세 분의 것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끝으로 EBS 도올특강에 초대되어 정선아리랑을 선보인 김영임 명창의 공연 유뷰브 표지를 소개한다.
김영임 명창의 연주를 들은 외국(주로 미국)의 네티즌들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올렸다. 그 중 둘만 번역해 보면, "오 맙소사! 이 여자분 노래를 들으면 죽었던 조상님네들이 다시 돌아오겠어요. 완전 소름! 와우 와우 와우. 완전 대박!"하는 앤드류 C님의 글이 있고, "한국어는 한 마디도 모르지만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네요. 아름답고 강력한 문화로 나를 감동시켜 줘서, 코리아 고마워요!'라는 노우지 게이머 님의 글이 있다.
들을 귀를 가진 외국인이라면 우리의 정서와 음악이 먹힌다는 얘기다. 유튜브 창에 영문 번역 자막을 넣은 것이 그들의 공감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국악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어느 정도의 외국어 실력이 필수다.
정선아리랑 가사 중에 다음과 같은 소절이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여기서 '만수산'은 개성 송도에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엽 조선창업을 반대한 고려 유신(遺臣) 72명이 송도(松都 :개성)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지내다가 그 중 전오륜을 비롯한 7명이 정선 남면 서운산 거칠현동(南面 瑞雲山 居七賢洞)으로 은거지를 옮기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며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이들 7현이 당시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롭고 고달픈 심정 등을 한시로 지어 읊었는데, 뒤에 세인(世人)들이 이를 풀이하여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는 삼국시대 고구려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하며 살았는데 배고파 허기가 진 여성과 아이들이 첩첩산중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개를 넘어가다 힘든 것을 참으려고 부른 노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그토록 '한'이 맺힌 노랫말과 가락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판소리 동편제 귀소성의 명인 송흥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조선 문화의 비밀은 판소리에 있고 판소리의 비밀은 시김새에 있다. 그런데 그 시김새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정선아리랑에 있다."
우리 음악은 한(恨)의 예술이다. 그러나 그 한은 한으로 끝나지 않는다. 흥(興)으로 이어진다. 어제와 그제, 하루 왼종일 정선아리랑을 듣고 또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한과 흥이 어우러진 노래라는 것이다. 골지천과 송천이 만나 '아우라지'가 되듯이 한과 흥이 만나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우리 음악, 우리 미학이 되었다.
아! 정선아리랑! 너무 좋은 우리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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