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살부터 판소리를 배워 김세종제 춘향가를 성우향 명창으로부터 전수 받은 소리꾼 이다은 님이 있다.
그동안 다양한 공연을 하며 활동해 오면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무려 13시간 동안 연창하며 세계 기네스 기록에 도전하기도 한 용기와 기백이 넘치는 소리꾼이다. 나는 이다은 님의 찐팬이다.
산책을 나갔다가 대로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고 익산의 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 판소리 공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드디어 시간에 맞춰 공연장에 도착했다. 많은 분들이 진즉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국악평론가 조동준 님의 해설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길어야 한 두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웬걸 장장 네 시간이나 이어지는 깜놀 공연이었다. 내 평생 이렇게 긴 시간 무슨 공연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이래저래 판소리는 정말 넘사벽 예술이다.
고수가 두 분이었는데 첫번째 고수는 원광디지털대학교 국악과 교수 김동원 님이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얼씨구' '그렇지' '잘 한다'와 같은 다양한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애정으로 북장단을 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후반부는 정읍시립국악원 교수인 박상주 님이 북장단을 쳐주었다.
보성소리 동편제 김세종제 판소리 춘향가는 장장 6시간 반에 걸쳐 완창되는 대하드라마 같은 1인 종합예술이다. 총 70여 대목 중에 가장 돋들리는 27편의 눈대목을 골라 4시간 정도에 걸쳐 완창한 것이 이번 공연이었다.
결연과 이별, 고난과 재회라는 네 파트 중 결연과 이별 공연을 두 시간 한 후 10분간 중간휴식 시간을 갖고 이어 고난과 재회 파트를 두 시간 동안 진행했다.
공연한 눈대목들은 다음과 같다.
초압, 적성가, 추천가, 금타령, 산세타령, 천자뒤풀이, 퇴령소리, 사랑가, 이별 초두, 춘향 사생결단, 춘향모 탄식, 춘향 통곡, 담장 안 이별, 내 행차 떠남, 춘향 탄식, 신연맞이, 십장가, 쑥대머리, 과거 급제, 농부가, 박석치, 어사또와 춘향모 만남, 파루, 옥중 상봉, 복관의 생일잔치, 암행어사 출도, 어사또와 춘향 재회.
비디오 카메라가 없어 그냥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판소리는 전승 과정에서 지역에 따라 혹은 소리꾼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섬진강 줄기를 기준으로 동쪽 지방에서 불린 동편제와 서쪽 지방에서 불린 서편제로 대별된다.
동편제가 대마디 대장단의 선이 굵은 소리라면, 서편제는 섬세함과 기교를 갖춘 소리로 특징을 짓는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크게 보아 동편제에 속하는 소리인데, 조선 8대 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세종에 의해 전승되어 온 소리이다.
김세종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가 고창에서 소리꾼들을 모아 교육할 때 소리 선생으로 판소리를 지도한 소리꾼이자 이론가였으며, 최초의 여성 소리꾼 진채선을 경회루 낙성연에서 출연시킨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 '김세종제 춘향가'의 눈대목을 완창한 이다은 님은 여자의 소리로는 보기 드문 수리성 성우향 명창에게 춘향가를 사사 받았다.
이다은 님의 소리는 공력과 패기로 젊은 소리꾼의 시김새가 돋보이며 여러 '제'와 '바디'를 섭렵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여 득음의 소리로 일취월장 하고 있다.
이다은 님은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 네 가지를 고루 갖춘 이 시대의 재능꾼이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판소리 춘향가 눈대목 공연을 들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판소리가 우리 민족 고유의 경이로운 종합예술이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음악 장르라는 것이었다.
판소리 춘향가에는 천문, 지리, 역사, 윤리, 남녀 애정 심리학, 고전 학문에 대한 평가, 조선 시대 관료 정치와 관직의 개요, 농사 짓는 일, 서민의 삶과 애환,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비겁한 행동에 대한 지적, 여인의 지조와 절개, 애절한 그리움, 고난을 이겨내는 여주인공의 투철한 의지력과 인내심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곳곳에 들어있는 파토스와 애잔함, 깨알 같이 박혀든 재치와 해학의 요소들, 관중을 웃고 울리면서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탄탄한 스토리의 전개는 관객과 연주자가 하나 되게 만드는 판소리 공연예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니리와 창, 발림으로 이루어진 이 천재적인 1인 공연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압도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엄청난 양의 아니리 대사와 고난도 수준의 창으로 이루어지는 눈대목 공연을 지근 거리에서 목격하고 들으면서 형언키 어려운 감동을 받았다.
합궁궁 궁딱딱 궁궁궁 당그라닥 따악딱! 몸짓과 고갯짓, 손짓, 발짓으로 12박 24박 난해한 박자의 북장단을 어깨너머로 따라가며 적절한 시점을 찾아 나름 추임새를 넣어보고, 눈으로는 발림과 너름새를 감상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재담 스토리에 울고 웃으며 즐기는 사이에 네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장장 네 시간 동안 귀와 눈이 호강하며 귀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정말 잊을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을 안겨준 소리꾼 이다은 님의 열정과 패기 넘치는 역대급 공연에 무한한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매년 1회씩 춘향가 발표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이다은 님의 판소리 천일야화! 이대로 꾸준히 계속되어 공연자와 관객 모두가 함께 즐기는 멋진 공연 이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린다.
익산 문화예술 공연의 보배 소리꾼 이다은 님의 무한한 발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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