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 알라딘과 알리바바, 신밧드가 나오는 이야기....
아랍어로는 '알프 라이라 와 라이라' أَلْفُ لَيْلَةٍ وَلَيْلَةٌ (Alf laylah wa laylah)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만 보던 아라비안나이트를 영역본으로 읽었다.
1909년 케이트 위긴과 노라 스미쓰가 편집한 350페이지 짜리 축약본이다.
원본은 380여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어마어마한 장편이지만 가장 재밌는 이야기 10개만을 뽑아서 20세기 초 미국의 독서 대중을 위해 고쳐쓰고 편집한 버전으로 읽었다.
읽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두 주에 걸쳐 시나브로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뜸 들여가며 읽었다. 다 읽고나니 이제 또 뭘 읽을지가 걱정이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6세기경 사산왕조 때 페르시아에서 모은 아라비안나이트 설화는 8세기 말경까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여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그후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경에 완성된 것이 오늘날의 아라비안나이트 소설이다. 이 소설은 1703년 아랍어본을 읽은 프랑스의 갈랑이 불어 번역판을 내어 유럽에 소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역자는 있지만 원작자는 미상이다.
가공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가 뒤섞이고, 인물도 역사상 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수없이 등장하는데 아바스왕조 제5대 왕인 '하룬 알 라시드'가 나오는 이야기가 가장 많고, 이야기의 무대는 바그다드가 제일 많다. 그밖에 아랍 국가의 다양한 도시들이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카이로·다마스쿠스·바스라 등이 자주 보인다.
읽으면서 특별히 느낀 것은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스토리텔링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이다.
아내를 죽이는 샤리아르 왕과 자진해서 아내가 된 세헤라자드 왕비라는 큰 이야기 구도 속에 작은 이야기들이 짜여져 들어가 있고, 그 작은 이야기 속에 또 다시 더 작은 이야기가 짜여져 들어가는 소위 액자식 구성을 선보인다. 그런가하면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관객을 설정하여 그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도 있다.
평범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런 구성 솜씨가 더해지고 나면 너무 재밌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뀐다. 스토리텔링의 마법이다. 이야기를 듣는 인간의 심리를 기막히게 포착하여 몰입도를 최고도로 높이는 솜씨는 정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재미도 재미지만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는 매우 교훈적이다.
일곱번째 목숨을 건 모험을 마치고 인도양의 섬에서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길에 해적과 풍랑이 두려워 여섯 번이나 선택했던 해로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육로를 통해 돌아오는 신밧드가 드디어 자신의 고향집에 도착하여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만큼 고생을 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나만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 이야기를? 이런 고생을 사서 하였으니 내가 이제 편안한 삶을 즐기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신밧드의 관점에서는 도전과 모험 없이는 부자가 될 수 없고, 도전과 모험 없이는 행복해질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며 살아 돌아오는데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모험을 떠날 궁리를 한다.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얻은 진귀한 보물들과 교역을 통해 얻은 엄청난 부로 친구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베풀며 대접하고,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 선다.
참으로 건전한 세계관이고 행복론이다. 그 어느 성인의 가르침보다도 공감이 간다.
감명 깊게 읽었던 이야기 한 꼭지를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이야기의 제목은 "코다다드와 그의 형제들(The History of Codadad and His Brothers)"이다.
아라비아의 도시국가 하란의 왕에게는 50명의 부인이 있었다. 49명의 부인이 49명의 왕자를 낳아준다. 50번째 부인 피루즈가 아들을 못 낳자 이웃 도시 사마리아로 쫓겨난다. 하지만 거기서 바로 아들 코다다드를 낳는다.
세월이 흘러 다재다능한 헌헌장부 코다다드가 자기 정체를 숨기고 아비인 하란의 술탄을 만나러 하란성으로 온다. 뛰어난 지모와 용맹함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군사령관에 임명되고 49명 왕자들의 책사로 임명된다. 모든 백성이 흠모하는 코다다드를 보며 질투의 화신이 된 왕자들은 코다다드를 함정에 빠뜨릴 궁리만을 한다.
책사인 코다다드의 허락을 받고 사냥을 나간 왕자들이 며칠째 궁궐로 복귀하지 않고 잠적해버린다. 왕은 격노하여 실종된 왕자를 못 찾아오면 코다다드의 목을 베겠다고 압박한다.
왕자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 코다다드가 위기에 처한 한 여인을 구하는데 그녀를 붙잡고 있는 식인 거인이 수백명의 포로를 자신의 성 감옥에 잡아 넣어놓고 한 명씩 골라 잡아먹는 희한한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용맹한 코다다드가 그를 공격하여 팔을 자르고 목줄을 따버린다.
감옥 열쇠를 빼앗아 감옥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 왕자들이 갇혀 있었다. 코다다드는 왕자들에게 사실은 자신도 술탄의 자식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피루즈 왕비임을 밝힌다. 형제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의 상봉을 한다.
코다다드는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고 오갈 데 없는 미모의 여인의 기구한 운명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사실은 데리야바르 섬 나라의 공주였는데 자신과 결혼시켜 주지 않는다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 청년에 의해 아비는 죽고 자신은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노예선이 풍랑을 만나고 이름 모를 섬의 이름 모를 종족에 의해 구조되었다가 다시 전란에 휩싸여 유랑을 하다가 마지막에 식인 거인에게 붙잡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코다다드에 의해 목숨을 구하게 된 공주는 자신을 구해준 코다다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코다다드 역시 여인이 마음에 들어 죄수들 앞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또 다시 질투심에 불탄 왕자들에 의해 코다다드는 칼찔림을 당하고 공주는 죽어가는 코다다드를 구하기 위해 부근 도시의 의원을 부르러 갔다가 서로 길이 어긋나며 헤어지게 된다. 모두들 코다다드가 죽었다고 믿었지만 코다다드는 때마침 지나가던 농부에게 발견되어 그의 마을로 들어가 영험한 약초 치료를 받게 되고, 목숨을 건지며 회복된다.
한편 기지가 뛰어난 의원의 도움으로 하란 궁에 입성하여 피루즈 왕비를 만난 공주는 그동안 겪은 모든 일을 왕비에게 고하고 코다다드가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는지를 말해준다. 다시 왕비로부터 전모를 듣게 된 술탄은 1천명의 군사를 풀어 49명의 왕자들을 잡아들이고 이들을 모월모시에 참수형에 처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그때 사이가 좋지 않던 이웃 나라가 도발하여 군대를 몰고 쳐들어 오고 두 나라 사이에 건곤일척의 일대접전이 벌어지는데 홀연히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저 멀리서 기병대가 도착하더니 이웃 나라 군대 중앙부를 공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어버린다. 이로 인해 백중지세로 힘든 싸움을 이어가던 하란 측이 대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왕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기병대의 선두에 섰던 젊은이를 불러오게 한다. 만나보니 그는 다름 아닌 코다다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아들이었다.
친모와 자신의 아내를 눈물로 상봉한 코다다드는 형장에 끌려나온 형들의 쇠사슬을 풀어주며 왕에게 사면을 요청한다. 온 나라 백성이 코다다드의 덕을 칭송하고 왕도 그를 후계자로 임명한다.
코다다드와 데리야바르 공주의 기구한 운명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인 이야기의 디테일 속에서 웅변으로 보여주는 교훈담이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모든 디테일이 살아있는 한 편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원수 사랑'의 교훈은 우리의 사이키(psyche)에 주는 무게가 다르다. 임팩트가 다르다.
가르침은 가르침으로만 끝날 때 그냥 메마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야기로 살을 붙일 때 그 가르침은 생명을 얻는다. 나는 이것이 스토리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코다다드는 정말 멋진 영웅이다. 이제 그의 이야기는 나의 사이키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나의 최애 이야기가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서 중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익히게 되었다. 성경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 듯하다. 시대는 조금 다르지만 같은 문명권에서 태어났다는 확신이 든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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